[안중근평화기자단] ‘의병’ 안중근을 아시나요?

대한국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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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안중근을 아시나요?

안중근 2팀 박상현

 

안중근 의사: 19091026일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이끈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민족의 영웅.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업적이다. 이와 더불어 안중근 의사의 의거 후 보여준 모습들과 일화들은 그분의 인물됨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중근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업적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과 국내진공작전이 대표적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쏘기 전 안중근 의사는 의병이었으며, 이는 안중근 의사가 신문, 공판과정 중, 시종일관 자신을 의병대장이라고 칭하며, 독립전쟁을 치루고 있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도 이러한 독립전쟁의 일환이라고 주장한 것으로부터 드러난다. 만약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과 국내진공작전을 자세하게 알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왜, 그리고 어디서 의병활동을 하였는가?

안중근 의사가 의병활동 이전에 하였던 구국운동은 교육사업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진남포에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었는데,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07년에 발생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 7조약으로 인한 군대 강제 해산을 통해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중되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충격을 받고 원대한 포부로 국외망명을 결심하고 의병활동에 투신한 것이다. 이것이 안중근 의사가 의병활동에 투신한 이유이다. 그 후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하며, 1909년까지 의병활동을 지속하며, 10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께서 연해주에서 활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안중근 의사가 국외망명 후 처음 머무른 곳은 북간도 용정의 천주교인 남회장의 집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이 집에서 2달 정도를 머문 후에 연해주로 이동한다. 이는 북간도의 상황이 의병활동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당시의 북간도는 이미 일본이 통감부 간도임시파출소를 설치하여 한국인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연해주로 망명하였으며, 연해주는 한국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이미 연해주에서는 이범윤과 최재형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안중근 의사의 의병으로서 가장 두르러진 활동: 국내진공작전

안중근 의사가 국내진공작전 당시 맡았던 직책은 동의군 우영장 참모중장이었다. 국내진공작전은 최재형의 동의군과 이범윤의 창의군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이 이끄는 동의군에서 우영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부대 하나를 거느릴 만큼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왕 밑의 우의정을 맡았다고 한다면 실감이 올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국내진공작전에서의 가장 큰 공적은 홍의동 전투일 것이다. 4대 소대의 200명을 통솔하는 안중근 의사는 함경북도 경흥군 홍의동에서 일본군 4명을 사살하였으며, 기세를 이어 경흥읍 헌병분견대를 습격하여 1명 사살, 5명 행방불명 시켰으며, 일본군을 도주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신아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일본군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안중근 의사의 인품은 전투 후에 발휘되는데, 안중근 의사는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인류 정의와 도덕적 견지에서 동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정의로우나 현실적이지 못했던 이 결정은 부하들의 불만을 사게 되어 결국 다수의 의병이 전선에서 이탈하여 연해주로 복귀하였고, 동료 부대인 좌영장 엄인섭의 부대 또한 의견충돌로 연해주로 복귀하게 되었고, 결국 안중근 부대가 속한 연해주의병은 영산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국내진공작전은 끝을 맺게 되었다.

비록 국내진공작전은 실패로 끝났으나, 안중근 의사가 홍의동 전투와 신아산 전투에서 보여준 능력과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적국의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풀어준 도덕성은 안중근 의사의 의로움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가 되어주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이 이토 히로부미 거사에 미친 영향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 경험은 구국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게 하였다. 또한 그 결과로 동지간의 결속과 독립운동에 더욱 헌신할 것을 맹약하고 그 징표로 삼기 위해 동지 11명과 동의단지회(단지동맹)를 결성하였는데,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동의군과 연결성을 가지는 단체이며, 이는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이 단지동맹을 결성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음을 드러낸다. 또한 앞서 서술하였듯이 공판과정에서 자신의 의거를 의병군 대장으로서 행한 독립전쟁이라고 밝히는 것은 의병활동의 연장선상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위한 조력자 중에 국내진공작전 당시 창의군 참모였던 우덕순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의병활동 사이에 연결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가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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