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단 4기) 인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청년안중근
2020-03-20
조회수 640

  2017413일 대법원이 인촌 김성수가 친일에 가담했음을 인정했다. 이후, 2018213일 국무회의에서 김성수의 건국공로훈장 박탈을 의결했다. 김성수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에 국방헌금 1,000원을 납부한 이력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를 비롯한 다른 신문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묘사하고 식민지 조선인들의 참전을 독려했다. 김성수의 전쟁 동조는 친일 반민족적 행위로 판단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 한편, 중일전쟁 이전 김성수의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인수와 경성방직주식회사와 동아일보사 설립도 친일 반민족적 행위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민족교육, 민족언론, 민족산업을 주도한 김성수

  김성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중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동아일보사에서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동아일보사에서 출판한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에서는 김성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인촌이 이룩한 세 가지, 민족교육, 민족언론, 민족산업 등 모든 사업들이 일제치하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확고한 뿌리를 가지고 민족정기의 온상으로 건재함도 그의 넓은 덕망과 어진 성품과 그리고 검소질박함과 부지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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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교우회, 고려대학교, 동아일보사에서 출판한 김성수 관련 서적(왼쪽부터)/ 출처 : 20181102 안중근청년기자단 이동희 기자]



  동아일보사는 김성수를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상황에서 민족의식을 수호하기 위해 학교를 인수하고 언론사를 설립한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다. 식민지 조선인의 신분으로 주식회사와 언론사를 설립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김성수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의 재산 60만 원(현재 시가 약 900)을 출자해가며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것은 식민지 조선인의 신분으로서 대단한 일이었다.

연정회와 민족적 경륜: 언급되지 않았던 김성수의 오점

  그렇다면 동아일보사의 출판물 주장대로 중일전쟁 이전까지 김성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을까? 물론 김성수가 중일전쟁 이전까지 일제의 통치에 가담하거나 선전하는 행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성수는 일제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행위를 했다. 중앙교우회, 고려대학교, 동아일보사의 출판물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김성수는 1920년대에 일제로부터 자치권을 얻기 위해 이광수, 최린, 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설립하려 했다
.

  설령 김성수가 식민지 조선인의 지위 신장을 위해 자치운동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1920년대는 일제가 3·1 운동 이후의 독립운동 열기를 잠재우고자 민족분열정책을 시행했던 시기이다. 이전에 식민지 조선인의 정치적 활동을 탄압했던 일제는 자치운동을 크게 탄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치운동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이 스스로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고 민족의 실력 양성을 우선시하는 개량주의자로 전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김성수의 자치운동에 가담은 일제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김성수의 오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민족언론인 <동아일보>에 정작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저해하고 일제의 지배에 이용될 여지가 있었던 이광수의「민족적 경륜」을 실리도록 방치한 책임이 있다. 「민족적 경륜」은 192412일부터 16일까지 <동아일보>에 기재되었는데, 다음은 13일에 실린 내용 일부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나 조선 내에서 전 민족적인 정치 운동을 하도록 신생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선 내에서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민족적 경륜」은 독립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 참정권을 확보하는 것이 식민지 조선인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언뜻 합리적인 대안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약화하고 식민 통치를 강화하려는 일제의 민족분열정책 목표에 일치한다. 그러나 동아일보사의 창립자이자 이사(理事)였던 김성수는 위의 글이 다섯 차례나 <동아일보>에 실리는 사태를 막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인 김성수에 대한 기억 투쟁

  위의 내용에서 확인되는 김성수의 행보를 고려했을 때, 각 기관에서 그를 기억하는 방식에 물음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려대학교의 본관 앞에는 김성수 동상이, 학교 안쪽에는 김성수의 호를 딴 인촌기념관과 그를 위한 추모비가 존재한다. 설령 김성수가 고려대학교의 위상에 상당한 공헌을 했더라도, 만인이 보는 접근할 수 있는 공간에 친일 반민족 이력이 있는 자를 기념하는 게 과연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김성수에 대해 칭찬으로만 가득한 추모비가 과연 민족사학고려대학교에 부합하는 처사인지도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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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의 김성수 동상과 추모비/출처 : 20181105 안중근청년기자단 이동희 기자]



  김성수의 건국공로훈장 박탈을 계기로 올해 3월부터 그의 잔재 청산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발생했다. 312일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제50대 총학생회 ABLE에서 인촌 김성수 흔적 지우기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당시 학생회에서 인권연대국원으로 활동한 관계자에 따르면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진행된 인촌 김성수 잔재 청산 서명운동에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총 2412명이 참여했다. 이 관계자는 411일 학생회 측에서 학교 학생처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서명지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처장은 본 사안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였으며, 서명지를 재단에 전달할 것이라고 답변했으나, 그 이후 학생회에 구체적인 회신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성수를 향한 맹목적인 비판무비판적인 존경을 넘어
 
  결론으로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하고 언론사를 설립한 행위 자체를 친일 반민족 행위로 판단하는 맹목적인 비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1920년대에 김성수는 식민지 조선인 핵심인사들과 함께 자치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에 명분을 제공했다. 한낱 필부(匹夫)가 아닌 국내 저명인사였던 김성수가 일제의 통치에 암묵적으로 일조한 사실은 그에게 더 엄격한 역사적 심판을 내려야 할 이유이다. 그의 일부 업적에 대한 존경심으로 무비판적인 존경에 가까운 일부 기관의 김성수 기억 방식도 지양될 필요가 있다. 언젠가 인촌 김성수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식민지 조선인의 실력 양성에 공헌했으나 일제의 통치에 명분을 제공하고 이후 일제의 전쟁에 동조한 자였소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안중근청년기자단 이동희 기자>

작성일 : 2018. 11. 1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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