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정치사상


민권사상의 형성 



안중근 의사는 당당한 문명독립국을 이루고자 하였다.

안중근은 자유민권 확립을 통해 백성을 압제하고 수탈하는 약한 정부를 개혁하고 당당한 문명독립국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의 교육, 식산운동은 자유민권 확립을 통한 근대국민국가 수립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처럼 민권의식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안중근의 국권회복 투쟁에 진력할 수 있었다. 

안중근의 국권회복운동의 밑바탕에는 민권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안중근의 민권사상은 국가권력의 침탈에 모순을 느끼면서 형성되었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개화론자로서 박영효 계통의 인물이었다. 안태훈은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갑신년(1884)에 상경하여 박영효가 일본에 유학 보내고자 선발한 개화파 청년 70명 중에 끼어 있다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수구파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더불어 가세도 기울러져 갔다. 이로 안중근 집안은 집안 살림을 모두 팔고 재정을 정리하고 가족들을 이끌고서 70-80명이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까지 가야만 했다.

1895년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탁지부대신 어윤중과 전 선혜청당상 민영준으로부터 농민군과의 전투 중에 군량미로 소모한 쌀 상환 독촉에 시달렸다. 이에 안태훈은 세력가 민씨의 압력을 피해 서울 명동성당으로 피신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그 이후 안중근 집안은 해서교안에 연루되어 정부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해서교안은 1901년부터 1903년까지 3년간 여러 차례 발발하였는데 상당수가 안중근 집안과 관련이 있었다. 안태훈(베드로)은 1897년 신천군수에게 체포되었다가 빌렘 신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며, 1898년 2월경에는 안태건(가밀로)이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채무자들로부터 거절당하고 해주감사에게 체포되었다. 그를 구하러 간 안태훈 역시 투옥되었다. 빌렘 신부가 해주감사에게 항의하여 안태훈은 석방되었다. 1899년 3월에는 안태건 등 천주교신자 4명이 도적으로 몰려 안악교졸에게 체포당하였다. 이 역시 빌렘 신부가 신천군수와 안악군수를 방문해 해결하였다. 


안태건은 장연사건에도 연루되었다. 신천의 천주교인 안태건을 비롯하여 12명이 법부의 훈령과 빌렘 신부의 서찰을 갖고 장연 관청에 난입, 염출한 돈의 반환을 요구하자 장연 군수는 이 사실을 관찰부에 보고하는 한편 장연 교우 6명을 체포하게 하였다. 


1902년 2월 정부는 사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안태훈과 안태건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빌렘 신부가 이들의 양도를 거절하는 바람에 좌절되었다. 안태훈은 정치적인 문제에 과격하게 언급한 것이 화근이 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빌렘신부가 해주감사에게 교섭하여 석방되기도 하였다. 어윤중, 민영준 등 수구파 봉건관료들의 수탈과 3년에 걸친 해서교안을 겪으면서 안중근은 관리들의 학정과 토색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사정을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그 당시 각 지방에 있는 관리들은 학정을 함부로 써서 백성들의 피와 기름을 빨아 관리와 백성 사이가 서로 원수처럼 보고 도둑처럼 대했었다. 다만 천주교인들은 포악한 명령에 항거하고 토색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들이 교인을 미워하기를 외적과 다름없이 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옳고 우리가 잘못되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 있었다.
 

백성들이 관리의 학정과 가렴주구를 원수나 도적처럼 보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천주교인만이 항거하여 토색질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였다. 안중근은 부패로 타락한 정부가 자신의 집안을 계속 탄압을 가하는 것에 저항하였다.

안중근은 자유민권 확립을 통해 백성을 압제하고 수탈하는 악한 정부를 개혁하고 당당한 문명독립국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의 교육,식산운동은 자유민권 확립을 통한 근대국민국가 수립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처럼 민권의식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안중근의 국권회복 투쟁에 진력할 수 있었다.




 
군주정에 대한 의문 



안중근의 민권확립에 바탕을 둔 근대국민국가 수립운동은 전제군주정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검찰관이 통감정치를 초래하게 된 한국민의 무능함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자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한국은 금일까지 진보하고 있으며 다만 독립 자위가 되지 않는 것은 군주국인 결과에 기인하며
그 책임은 위에 있는지 밑에 있는지는 의문일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은 진보하고 있으며 독립을 보전하지 못하고 국권을 상실하게 된 책임은 군주정체에 있지만, 군주와 국민 모두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안중근은 자신의 국권회복 투쟁이 민족전체를 위한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1909년 1월 안중근을 맹주로 하는 정천동맹회(正天同盟) 회원들은 단지동맹을 맺으면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혈서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외친 후 언제가 기회가 오면 의병을 재기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다짐하였다. 이들은 의병전쟁의 목표는 국권 회복이었다.

 


민권·민족국가 지향



안중근의 민권사상은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만일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어디 있을 것이오, 
더구나 나라란 몇 개 대관들의 나라가 아니라 당당한 이천만 민족의 나라인데 
만일 국민이 국민된 의무를 행하지 아니 하고서 어찌 민권(民權)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안중근의 민권사상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국가는 국민의 국가”라는 국민국가 사상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한국민으로서 한국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국적(國賊)”이라고까지 하였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므로 국권을 되찾아야 할 책임도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주권재민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등 저격을 “나 일개의 생각뿐만 아니라 곧 한국 이천여만 동포의 대표로 결행한 것이다”라 하여, 하얼빈의거를 이천만 동포의 권리를 되찾는 독립전쟁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자신의 의거는 4천년 역사와 2천만 동포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국민의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안중근의 교육·식산 운동은 민권확립을 통한 근대민족(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의병운동을 전개하면서도 교육에 힘쓰고 국민의 뜻을 단합하고 신문을 구독하는 등 민권운동을 늘 병행하였다. 다음 외재적 요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선진사상의 영향과 수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