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국권회복운동


민족의식 형성



안중근의사는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 민족을 종교보다 우선시하였다.

안중근 집안은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래 국가권력의 침탈로 부터 많은 보호를 받았다. 황해도 천주교회의 책임자격인 빌렘신부는 치외법권을 소유한 선교사로서 지방관과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발생한 수많은 분쟁들에 개입하여 직접 해결하거나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은 주교에게 부탁하거나 주한 프랑스 공사에 의뢰,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케 하였다. 빌렘 신부는 그의 관할지역내에서의 괄목할 만한 교세 신장의 원인으로 선교사들의 분쟁 해결 노력과 함께 신도들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들었는데, 헌신적인 신도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안중근의 작은아버지 안태건이었다. 안중근 역시 작은아버지 못지않은 열렬한 신심의 소유자로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로 수행하여 해주 옹진 등의 여러 지방을 순방하여 연설을 하였으며. 1897년 12월 1일에는 청계동을 방문한 뮈텔 주교를 수행하여 해주까지 가기도 하였다.

안중근은 “지금 세계 문명국 박사, 학사, 신사들로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천주교를 문명교화의 상징으로까지 이해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외국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드러내는 한국인들을 압제하는 태도에는 당당히 저항하였다. 당시 치외법권을 소유한 선교사로서 국가권력에 맞서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던 빌렘 신부가 한국인들에게 군림하며 압제하였기에 안중근과 마찰을 일으켰다.

또한 1900년 경 안중근은 뮈텔 주교를 찾아가, 한국 교인들이 학문에 어두워서 교리를 전도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알고 서양 수사회(修士會) 가운데서 박학한 선비 몇을 청해다가 대학교를 설립하여 국내의 자제들을 가르칠 것을 건의하였다. 안중근은 교육을 통해 한국인을 문명하기 위해 경성에서 천주교 대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선교사에게 의논했던 것이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한국인이 만일 학문이 있게 되면 교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의논을 꺼내지 말라”며 거절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분개함을 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맹세하되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하고, 홍신부로부터 배우던 프랑스어 공부를 중단하였다. 여기서도 안중근이 천주교와 선교사를 분리해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의 주체적인 신앙 태도는 일찍이 민권의식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민권의식이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대한 자각으로, 안중근은 이를 천주교 교리와 천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숭배를 통해 습득하였다. 안중근은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부당한 압제에 저항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당시 한국에서 선교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들 역시 하느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엄격히 구분하는 전통신학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이 신학에서 강조한 것은 오직 초월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관심사 이를테면 내세중심의 영혼구원에만 충실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현실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영성생활을 저해하는 위험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실제로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서 활동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침탈되어 가는 한국의 국권이 아니라 그들의 선교권 보장이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에게 한국 민족수난의 고통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일투쟁을 근본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한국침탈에 대해 무력으로 항거하기 보다는 실력양성의 방법을 권유하였다. 대부분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전개하였던 의병운동에 비판적이었다. 실제로 빌렘신부는 안중근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려 하자, “네가 만약 참으로 국사에 진력(盡力)하려면 모름지기 교육에 종사하고 곁들여 선량한 교도 착실한 국민이 되게 하라. 네가 일시의 분격에 의해 경거하여 국사에 분주하는 따위는 다만 네 일신을 망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라고 하여, 국내에 남아 교육운동을 통한 실력양성에 매진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중근의 하얼빈의거에 대해서도 한국의 전(全) 가톨릭을 담당했던 교구장 뮈텔 주교는 “공적인 재난”으로 규정하고, 안중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반면 안중근은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에 반대하였던 조선교회의 방침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안중근은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조선 가톨릭의 존재의미는 민족을 구원하는데 있다는 의미이다. 안중근에게 국권회복은 신앙이자 가톨릭 정신을 실천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안중근은 하느님의 뜻인 평화를 어기고 대한의 독립을 막은 이등박문을 저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안중근은 저격은 ‘비인도적 살인행위’라는 검찰관의 비난에 맞서 ‘이천만 동포의 염원을 대표한 독립전쟁(義戰)’이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교육·식산 투쟁



적자생존이 아닌 평화공존의 인도주의적 문명론을 개진하였다. 


“무릇 문명이란 동서양 잘난 이 못난 이 남녀노소를 물을 거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다”

안중근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교육, 식산투쟁을 벌였다. 이는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 문명개화를 이룩하여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었다. 안중근은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날마다 신문과 잡지와 각국 역사를 상고하며 읽어 이미 지나간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일들을 추측하는 등” 시국에 대한 인식을 갖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을 군사 점령한 이후, 안중근은 국권회복 투쟁을 위해 중국 상해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상해로 망명하여 열강들에게 조선민족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여 국권을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상해의 천주교당 앞에서 황해도 재령의 본당 신부였던 르각(Le Gac, 곽원량(郭元良), 1876-1914) 신부를 만나, “속히 본국으로 돌아 가서, 첫째 교육의 발달 둘째 사회의 확장 셋째는 민심의 단합 넷째는 실력의 양성 등 네가지를 확실히 성취하도록 하라”는 훈계를 듣고 곧장 진남포로 돌아왔다. 르각 신부는 안중근에게 실력양성을 권유한 것이었다.

독립투쟁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 바로 학교설립을 통한 교육투쟁이었다. 교육구국론이었다. 당시를 학교설립의 시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국적으로 각종 학교가 세워지고 있었다. 안중근도 실력양성의 일환으로 교육투쟁에 종사하였다. 안중근은 교육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국권회복은 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며 교육은 근대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육 활동을 위해 안중근은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당시 명칭은 삼화항(三和港)) 용정동으로 이사하였다. 안중근은 진남포 본당에서 운영해 오던 돈의(敦義)학교의 재정을 부담하며 제2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같은 본당 내에 설치된 삼흥(三興: 사흥(士興), 민흥(民興), 국흥(國興))학교의 재정을 받아 운영해 나가며 구국영재를 양성하였다.

안중근은 식산 투쟁에도 종사하였다. 국권회복 투쟁의 하나의 영역은 식산흥업운동이었다. 안중근은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고자 평양에 가서 한재호(韓在鎬) 주병운(朱秉雲) 등과 함께 삼합의(三合義)라는 석탄을 채굴하는 상업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 해 봄에는 서우학회에 가입하였으며, 여름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의 방해로 석탄상이 실패하고 수 천 원의 손해를 보게 되자 교육·식산운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으며, 게다가 1907년 ‘정미늑약’이 체결되자 해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안중근의 교육·식산운동은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이었다. 한국 독립은 국력 충실이 근본이며 국력충실은 인지를 계발하고 식산 공업을 성대하게 하는데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교육과 실업 장려로는 대한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중근은 하얼빈의거 직후 열거한 이등의 죄상 15조 중, 교과서 압수 소각, 내외국 신문구독금지, 교육방해, 외국유학 금지 등은 교육권 박탈과, 제일은행권 강제발행, 국채 강제부담, 철도·광산·산림·천택 강탈 등은 일제의 경제권침탈을 의거의 이유로 들었다. 이는 교육·식산운동의 실천적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이 때문에 안중근은 국권회복 방법론으로 실력양성 투쟁에서 무력투쟁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일본을 분석적으로 보고 있던 안중근은 “점점 한국은 이등으로 인하여 불리해지므로 마음이 변하여 이등을 적시(敵視)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즉 날로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객관적인 상황을 보면서 일제 침략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 결과 국적(國賊) 이등을 처단하였던 것이다.


의병전쟁



그는 스스로 강한 힘으로 국권을 회복해야만 건전한 독립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강력한 무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라고 생각하였다.


1907년 정미7늑약으로 광무황제(고종)가 폐위하고 사법권을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었으므로 한국은 이미 국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항의하여 인민이 일제히 분발하여 전국에서 의병전쟁을 일으키자, 안중근은 해외에 독립투쟁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07년 8월 경성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안중근은 “스스로 강한 힘으로 스스로가 국권을 회복해야만 건전한 독립이라 할 수 있다.”고 하여 강력한 무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라고 생각하였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에게 의병 부대 창설에 설득 작업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인섭·김기룡과 의형제를 맺고, 이범윤과 독립전쟁 방략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연해주 한인들은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 단계로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안중근은 동포사회를 돌아다니며 의병부대 창설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노적(老賊) 이등이 양민을 폭도라 몰아 10만 명 이상을 도륙하고 한국을 침략하여 을사늑약과 정미7늑약을 강제로 맺었으며, 황제를 폐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철도·광산·산림·천택을 뺏지 않은 것이 없으며, 관청으로 쓰던 집과 민간의 큰집들은 병참이라는 핑계로 모조리 빼앗아 거하고, 기름진 전답과 오랜 산소들도 군용지라는 표말을 꽂고 무덤을 파헤친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는 국가의 주인인 백성들이 직접 일어나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우리가 단결하여 주체적으로 일어나 싸우면 국권회복의 기회도 올 것이라고 동포들을 설득하였다. 안중근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 보아도 결국 한번 의거를 일으키는 것만 같지 못하니 적을 치는 일 밖에는 다시 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의병 거병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안중근이 이와 같이 진력하는 등 다수의 한인들이 호응하여 무기, 자금 등을 지원하였다. 마침내 국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총독(總督)에 이범윤, 총대장에 김두성을 추대하고 안중근은 참모중장의 임무를 맡아 의병전쟁을 개시하였다. 안중근은 의병과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 모은 후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접전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하였다. 최재형은 안중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의병부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수청(水淸)·하바로프스크 등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사회의 교육과 사회조직 건설에 힘썼다. 1909년 1월(음력), 안중근은 연추의 카리(가리(哥里), 가리(可里) 또는 하리(下里))에서 동지 11인과 정천동맹을 맺고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민심이 산란하고 또 안중근을 믿는 자가 없었으므로 국가를 위해 진력하는 열심을 타인에게 보이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지를 한 것이다. 이들은 정천동맹을 맺은 후 그 뒤에 각처로 왕래하며 교육에 힘쓰고 국민의 뜻을 단합하고 신문을 구독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는 등 교육 활동에 다시 진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명령인 평화와 대한의 독립이라는 가톨릭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1909년 10월 26일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천만 동포를 대표하여 하얼빈에서 이등을 처단하였다.

정천동맹 결성 당시 쓴 대한독립기와 자른 손가락
정천동맹 결성 당시 쓴 대한독립기와 자른 손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