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영향


안중근 의사는 악한정부를 개혁하고 당당한 문명독립국을 이루고자 하였다.

안중근은 민권사상과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천주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 그의 민권사상과 민족의식은 국권회복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905년 이후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는데, 1907년 이전까지는 교육식산운동인 실력양성운동을 하였다. 그는 교육운동을 통해 인지를 계발하고 실업운동을 통해 산업을 발달시켜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국민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07년 정미조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상실하자 국권회복운동의 방향을 의병전쟁으로 전환하였다. 실력양성운동론에서 무력투쟁론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  침략성을 인식하면서 문명개화보다 국권회복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안중근의 의병론은 공립협회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안중근은 민권사상에 바탕을 둔 국권회복운동에 근거하여 전제군주정을 비판하였다. 전제군주정 때문에 국권을 상실하였고, 나라가 쇠망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사상은 군주주권의 군주정을 비판하고 국민주권의 공화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독립국가의 정체로 공화정을 염원하였다. 안중근의 공화주의 이념은 민권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블라디보스톡에 전파된 선진사상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었다.


안중근의 국권회복운동은 군주주권의 전제주의 청산과 국민주권의 공화주의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3.1 운동이후 임시정부 수립으로 구체화되었다.

여순지방법원의 안중근 의사와 동료들(왼쪽부터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
여순지방법원의 안중근 의사와 동료들(왼쪽부터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