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못한 영웅(英雄)
안중근 1팀 장유정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의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주길 바란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조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만약 하늘에서도 조국 광복의 소식을 듣는다면 나는 혼령들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는 돌아오지 못한 영웅,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이다. 그가 순국한지 107주기가 되는 2017년, 그의 유언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한 소원으로 남아있다.
현재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에 위치한 효창공원 내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묘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삼의사(三義士)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이 삼의사의 묘 옆에 유일하게 유골이 없는 가묘(假墓)가 있다. 바로 민족의 영웅이라 불리는 안중근 의사를 위해 남겨놓은 묘역이다. 그곳은 왜 아직까지 비워져 있는 것일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의 사형집행이 진행되었고 그는 31세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사형 직후 그의 유해는 어떻게 되었을까. 본래 일제의 감옥법 제 74조에 의하면 “시체와 유해의 교부에 대해 사망자의 친척 또는 친구가 요청할 경우 언제라도 교부할 수 있고, 단 합장 후에는 이에 한하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안중근 의사의 시신 역시 그의 유족에게 인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는 그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비밀리에 형무소 뒷산에 매장한다. 그 이유는 그의 유해를 하얼빈이나 한국에 묻는다면 그 곳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일제는 매장지에 관한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뤼순 감옥 뒷산 어딘가에 묻힌 채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1945년 11월, 광복 후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 그가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찾아 국내로 봉환하는 것이었다. 현재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를 안장한 후 네 번째 묘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와 안장할 계획이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도 접촉하여 안 의사의 유해 봉환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그는 끝내 네 번째 묘의 주인을 찾지 못하고 암살당해 세상을 떠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작업은 더욱 난항에 빠지게 된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안중근유해봉환문제에 있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은 1970년대 중반 안중근 유해발굴단 단장으로 발탁돼 중국에 파견되어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서 돌아온 대답은 안중근 유해 발굴, 조사 사업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한국에서 안중근유해봉환문제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사안이었다. 즉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일본의 한 고위 관료가 “한국교과서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원흉이라 부르면서 암살자인 안중근(安重根)을 영웅시하고 있다.”라는 망언을 한 계기로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그의 유해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한 일본인의 망언으로 여론이 움직인 것이다. 이후 1984년 8월 31일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는 본격적으로 안중근의 유해 환국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뤼순감옥 일대를 방문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안 의사의 묘는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불도저에 밀려 평지로 변했고 나무까지 심어져 있었다.”는 박한식 교수의 주장에 따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환국 사업은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른 지형변화 등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게다가 2008년 남북공동 진행으로 발굴사업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당초의 합의와 달리 북한 측이 유해 발굴 불참의사를 통보해왔다. 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한국 단독으로 유해 발굴에 착수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부실한 자료조사가 문제였다. 안 의사가 순국한 당시 뤼순감옥 소장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 여사의 증언(1909년 당시 7-8세)에 의존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각에서는 정부의 발굴 작업이 이미 예상된 실패라고 보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의 묘소에 참배했던 동포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정부가 당초 주장한 곳이 아닌 뤼순감옥 동쪽 묘지 터를 일치되게 지목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이마이 여사의 말만 믿고 그 장소에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더 폭 넓은 전수조사를 통해 다양한 증언을 확보했더라면 지금쯤 안중근 의사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 후에도 우리는 유해 발굴을 위한 꾸준한 노력을 해왔다. 안 의사 순국 105주기였던 지난 2014년, 한국 정부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는 지표 투과 레이더 탐지를 중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식적인 답변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 안중근 의사가 묻혀있다고 추정되는 뤼순감옥 동쪽 묘지 터 바로 앞에는 높은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당장 묘지 터는 얇은 울타리 하나를 두고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으며 언제 파헤쳐질지는 미지수이다. 즉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얼빈 땅에서 “코레아 우라”를 외치던 31세 청년을 우리는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다. 잘린 손가락을 자랑스러워하며 목숨조차 아까운줄 몰랐던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우리는 과연 그를 조국 땅에 모실 수 없는 것인지 그가 순국한지 107주기를 맞으며 의문을 가져본다.
돌아오지 못한 영웅(英雄)
안중근 1팀 장유정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의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주길 바란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조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만약 하늘에서도 조국 광복의 소식을 듣는다면 나는 혼령들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는 돌아오지 못한 영웅,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이다. 그가 순국한지 107주기가 되는 2017년, 그의 유언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한 소원으로 남아있다.
현재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에 위치한 효창공원 내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묘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삼의사(三義士)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이 삼의사의 묘 옆에 유일하게 유골이 없는 가묘(假墓)가 있다. 바로 민족의 영웅이라 불리는 안중근 의사를 위해 남겨놓은 묘역이다. 그곳은 왜 아직까지 비워져 있는 것일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의 사형집행이 진행되었고 그는 31세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사형 직후 그의 유해는 어떻게 되었을까. 본래 일제의 감옥법 제 74조에 의하면 “시체와 유해의 교부에 대해 사망자의 친척 또는 친구가 요청할 경우 언제라도 교부할 수 있고, 단 합장 후에는 이에 한하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안중근 의사의 시신 역시 그의 유족에게 인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는 그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비밀리에 형무소 뒷산에 매장한다. 그 이유는 그의 유해를 하얼빈이나 한국에 묻는다면 그 곳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일제는 매장지에 관한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뤼순 감옥 뒷산 어딘가에 묻힌 채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1945년 11월, 광복 후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 그가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찾아 국내로 봉환하는 것이었다. 현재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를 안장한 후 네 번째 묘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와 안장할 계획이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도 접촉하여 안 의사의 유해 봉환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그는 끝내 네 번째 묘의 주인을 찾지 못하고 암살당해 세상을 떠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작업은 더욱 난항에 빠지게 된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안중근유해봉환문제에 있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은 1970년대 중반 안중근 유해발굴단 단장으로 발탁돼 중국에 파견되어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서 돌아온 대답은 안중근 유해 발굴, 조사 사업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한국에서 안중근유해봉환문제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사안이었다. 즉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일본의 한 고위 관료가 “한국교과서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원흉이라 부르면서 암살자인 안중근(安重根)을 영웅시하고 있다.”라는 망언을 한 계기로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그의 유해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한 일본인의 망언으로 여론이 움직인 것이다. 이후 1984년 8월 31일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는 본격적으로 안중근의 유해 환국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뤼순감옥 일대를 방문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안 의사의 묘는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불도저에 밀려 평지로 변했고 나무까지 심어져 있었다.”는 박한식 교수의 주장에 따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환국 사업은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른 지형변화 등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게다가 2008년 남북공동 진행으로 발굴사업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당초의 합의와 달리 북한 측이 유해 발굴 불참의사를 통보해왔다. 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한국 단독으로 유해 발굴에 착수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부실한 자료조사가 문제였다. 안 의사가 순국한 당시 뤼순감옥 소장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 여사의 증언(1909년 당시 7-8세)에 의존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각에서는 정부의 발굴 작업이 이미 예상된 실패라고 보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의 묘소에 참배했던 동포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정부가 당초 주장한 곳이 아닌 뤼순감옥 동쪽 묘지 터를 일치되게 지목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이마이 여사의 말만 믿고 그 장소에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더 폭 넓은 전수조사를 통해 다양한 증언을 확보했더라면 지금쯤 안중근 의사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 후에도 우리는 유해 발굴을 위한 꾸준한 노력을 해왔다. 안 의사 순국 105주기였던 지난 2014년, 한국 정부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는 지표 투과 레이더 탐지를 중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식적인 답변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 안중근 의사가 묻혀있다고 추정되는 뤼순감옥 동쪽 묘지 터 바로 앞에는 높은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당장 묘지 터는 얇은 울타리 하나를 두고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으며 언제 파헤쳐질지는 미지수이다. 즉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얼빈 땅에서 “코레아 우라”를 외치던 31세 청년을 우리는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다. 잘린 손가락을 자랑스러워하며 목숨조차 아까운줄 몰랐던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우리는 과연 그를 조국 땅에 모실 수 없는 것인지 그가 순국한지 107주기를 맞으며 의문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