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제국주의, 역사를 만나다…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사 풍경’

대한국인
2011-06-03
조회수 1759
쓰러진 제국주의, 역사를 만나다…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사 풍경’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사 풍경/이충렬/김영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린 건 러시아 군인들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공식 사진사도 여럿 섞여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7연발 권총으로 이토를 조준사격하고 체포되기까지 찰나의 드라마는 현장에 있던 러시아 사진가의 활동사진에 고스란히 찍혔다. 당시 ‘황성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언론에 1만5000원에 팔린 뒤 도쿄에서 상영까지 됐다는 이 필름.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저격 순간과 직후 이토 모습을 담은 영상의 하이라이트는 훼손돼서 알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쓰러진 이토의 표정과 자세를 그저 상상이나 해볼 뿐이다.

‘간송 전형필’의 저자인 이충렬씨가 쓴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에는 그가 5년쯤 전 미국의 한 경매 사이트에서 찾아낸 쓰러진 이토의 삽화가 담겨있다. 사진은 아니지만 저격 직후 이토를 묘사한 최초 그림이다. 삽화는 사건 발생 12일 후인 1909년 11월 7일 이탈리아 군사주간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면에 실렸다. 안 의사의 의거가 식민지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모국조차 뒤흔든 뉴스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삽화는 러시아 군인의 부축을 받은 채 축 늘어진 붉은 완장 찬 이토를 정면에서 잡았다. 뒤편으로는 역사가 보이고 좌우에는 군중의 혼란이 그러졌다. 안타깝게도 삽화와 관련된 정보는 거기까지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그간 저격당한 이토 사진이나 그림은 알려진 게 없었다. 새로운 자료인 건 맞다. 하지만 삽화가가 현장을 본 것인지, 자료나 사진을 토대로 그린 것인지, 상상 그림인지 확인돼야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책에는 이토 이외에도 구한말과 일제시대, 6·25전쟁 직후를 관통하는 근대의 풍경이 담겨있다. 곡식 싣고 흘러가는 돛배의 고즈넉한 풍광을 잡은 미국 화가 릴리언 밀러의 ‘한강의 황포돛배’(1920)와 ‘노을 속의 황포돛배’(1928)를 소개한 대목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포구 중심의 상권과 객주들 이야기를 포착했다. 영국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궁중예복을 입은 공주’(1926∼27년 사이) 속 공주의 정체를 추적하기도 했다. ‘크리스천 계열 대학 교수와 결혼한 유부녀’라는 화가 말을 단서로 교육가 유억겸(1895∼1947)의 아내 윤희섭이라고 결론내렸다.

황실 친인척을 모두 ‘공주(princess)’로 적던 당시 외국인들의 관행도 소개했다. 10년 넘게 한국 근대와 관련된 그림 및 사료를 수집해온 저자는 이중 1898∼1958년 사이 86점의 그림으로 60년의 시간을 풍성하게 복원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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