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단 4기) ‘미군정 3년, 친일청산 실패의 시작과 완성’

청년안중근
2020-03-20
조회수 1014

미군정의 반공정책은 친일파 부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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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사령부 소속의 마글린 대령과 서울 10곳의 친일파 출신 경찰서장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 살았고, 닥싸귀같은 로스케(러시아인)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인직이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 소설 꺼삐딴 리-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배반하며 일본에 아첨하던 자들이 해방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며 정국을 주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우리는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을까? 많은 배경과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당시 세계정세와 맞물려서 우리의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815일 이후에도 조선총독부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그 사이 친일파들은 빨갱이를 때려잡는 반공투사로 변신할 준비를 했다. 역사가 뒤틀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458월 초, 일본의 패망은 다가오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항복을 하고 나서 벌어질 조선 군중들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조선의 민족지도자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넘겨주고 일본인의 안위를 보전하고자 했다. 여운형은 즉시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시켜주고, 건국준비 활동에 총독부가 불간섭한다는 조건을 받아내어 협조에 승낙했다. 결국 814일 이후, 조선의 치안권을 여운형과 안재홍 등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주도하면서 전국에 자치기구 형태의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부수립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일본의 왜곡된 공작으로, 미군정은 조선을 적국으로 인식

남한에는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
- 조선총독 아베 -
 
귀하에게 우리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38선 이남 치안유지 책임을 맡긴다.”
- 연합군사령관 맥아더 -


  사실 일본은 소련이 서울까지 진주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과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중도좌파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넘겨준 것이었다. 그러나 45816, 38선 이남 지역에 미국이 상륙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총독부의 태도는 돌변했다. 총독부는 여운형과의 약속을 파기했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총독부의 계획은 조선의 부정적인 인식을 미국에게 심어주고 군정통치 동안 권력을 유지하여 친일세력 중심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군단과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 보고형식의 정보를 수시로 타전하면서 조선의 공산화 위험을 왜곡하여 전달했다. 당시 조선에 무지했던 미군은 일본의 왜곡된 보고를 전적으로 믿으며 서울로 상륙하기 전까지 통치에 관한 전권을 조선총독에 유임했다. 또한 4599일 상륙이후에도 미군은 총독부 관료와 일본인 통역들이 제공하는 정보와 서비스에 의존했으며 조선인과의 접촉을 꺼렸다. 결국 미군정의 일본편향적인 태도는 반일성향이 강한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을 배제하고, 친일성향이 강한 총독부 출신 관료와 친일경찰이 다시 등용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총독부가 계획한 친일정권 수립의 퍼즐이 조금씩 맞춰가는 순간이었다.

미군정의 목표는 오직 반공정권 수립, 친일청산은 안중에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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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




  194599일 오후 419, 35년 동안 한반도를 통치했던 조선총독 건물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다. 이제 한반도는 식민지배 시대를 지나 미군정의 통치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는 항복문서를 통해 총독부의 존속과 그 예하 행정 관료들의 유임을 발표했다. 이는 총독부의 기능이 유지되는 것으로 해방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하지는 일본의 점령지였던 조선을 준 패전국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미군정이 정한 항복의 조례와 규정을 적용받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인의 반발과 국제여론의 비판이 계속되자, 총독부 존속 규정은 맥아더 연합국사령관의 지시로 폐지됐다. 그러나 규정 내용을 총독부 출신대신 경험 많은 한인이라는 조항으로 수정하면서 친일세력의 관직 진출을 막지 못했다.

 
  미군정은 남한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치안력과 군사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남한에 파견된 미군의 병력은 5~72천 명 수준이었기 때문에 5만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 세력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경찰을 동원하여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친일파 숙청에 따라 남으로 탈출해온 친일경찰도 여기에 참여시켰다.

  그 결과 46111일 기준, 경찰의 간부 80% 이상이 천황에 충성했던 총독부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다. 결국 미군정 시기 경찰은 민족을 배반했던 반역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미군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세력의 군사조직인 국군준비대를 제거하고자 국방경비대를 만들었고,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하여 반공임무를 수행할 병력을 길러냈다. 이를 통해 천황에 충성을 맹세했던 만주군과 일본군이 국군의 중심으로 성장하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친일청산 실패의 진정한 원인은 스스로 독립국이 되지 못한 것

  피로 얼룩진 미군정의 반공 통치기간이 끝났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며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미군정의 반공정책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렇다면 친일세력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고위 행정관료, 국회의원, 군대·경찰 고급 지휘관 등을 차지하며 남한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결국 역사적 심판의 칼날은 친일세력들을 빗겨가고 말았다. 그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형성하여 친일청산을 외치는 자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또한 북진통일을 주창하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며 친일청산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억눌렀다. 이처럼 미군정이 심어놓은 반공전선은 친일세력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버렸다


  1945815, 일본에 항복 소식을 듣고 김구는 이것이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라고 한탄했다. 즉 우리 스스로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강대국의 정치적 논리에 의해 한반도의 역사가 진행될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이었다


  친일청산 실패가 남긴 것은 우리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자주성의 중요함이다. 누군가에 의존하여 얻은 자유는 또 다른 억압과 구속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연합국의 승리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식민지 백성에서 자유민이 되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또 다른 억압적 기제에 구속당했다. 그래서 민족적 과제였던 친일청산을 우리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민족반역자가 떵떵거리며 사는 굴욕적인 역사를 지켜봐야 했다. 안타까운 역사이다. 그러나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성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는 강대국의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역사가 재현되지 않았으면 한다.



<안중근청년기자단 윤승준 기자>



작성일 : 2018. 11. 1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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