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이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사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시일야방성대곡 中)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의 두 얼굴?
1905년 대한제국,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일제에 강탈당한 시기에 한 언론인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민족적 분노를 표현하는 명사설을 《황성신문》에 실었다. 이 언론인은 바로 위암 장지연 선생(1864~1921)이다. 장지연 선생은 이 외에도 흥사단 평의원을 맡거나 『경남일보』에 한일강제병합을 비난하며 자결한 매천 황현의 「유시(遺詩)」를 게재하기도 하며 일제탄압에 대해 저항활동을 펼쳤다. 이렇듯 장지연 선생은 꽤 오랜 시간동안 항일언론인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장지연 선생이 말년에 “동양평화를 위해 일본을 도와야 한다”는 등의 글을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수차례에 걸쳐 기고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의혹과 논란이 있다.
장지연 선생의 친일은 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장지연 선생은 일본을 ‘동양의 패왕’(1916년 9월 16일자 “만록-지리관계”)이라 했으며, ‘아시아를 재패한 전술로 볼 때 아시아의 독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915년 4월 21일자 “만필소어-신구학”)라고 서술하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아울러 장지연 선생은 데라우치 총독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세계의 보물이라 칭찬하고 박물관 공개를 추진했을 때 이에 감격하는 내용이 담긴 글(1915년 3월 25일자 “패창만필”)과 일왕의 제삿날에 가계(계통)를 소개하는 글(1915년 4월 3일자 “만필소어 신무천황제”)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만약 진실이라면 가히 충격적인 행보이다. 하지만 장지연 선생의 친일행적 논란에 대해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기자는 이 기사를 쓰기에 앞서 주변 지인 50명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기자의 지인 50명 중 장지연 선생의 친일행적 의혹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단 6명에 불과했으며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 또한 3명에 그쳤다.
설문 조사에 응한 지인 중 대부분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선생의 친일 논란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시일야방성대곡’은 고교시절 받았던 국사 교육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다룬 주제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사료인데다, 수능 출제율 또한 높은 범위에 해당됐기 때문이다.
‘우국지사 언론인’ 위암 장지연, 친일 논란 점화
장지연 선생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1894년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기도 했다. 1899년에는 <시사총보(時事叢報)> 주필, 1901년에는 <황성신문>사 사장 겸 주필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썼고 이로 인해 3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1909년부터는 ‘전국 지방지의 효시’로 알려진 <경남일보> 주필을 맡았는데, 이 때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해 이후 <경남일보>는 폐간되기도 하였다.
장지연 선생의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정부는 지난 2011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장지연 선생을 포함한 독립유공자 19명에 대한 서훈 취소를 결정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장지연 선생의 친일행적이 분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바로 어제까지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던 장지연 선생은 졸지에 친일파로 전락했고 반발은 거셌다.
국내에는 사단법인 ‘위암 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가 결성돼 있고, 매년 ‘위암 장지연상’등을 시상하기도 했다.
이 상을 수상했던 인사들은 장지연 선생의 건국훈장 서훈 취소 당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쪽만을 부각시켜 사람에 대한 평가를 갑자기 뒤엎는 것은 성숙한 역사관이 아니다”며 “아주 잘못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또 다른 매체는 장지연 선생의 친일 의혹을 제기했던 ‘민족문제연구소’ 측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가가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은 선례”라고 옹호했고 동시에 장지연 선생의 친일 논란은 점점 심화됐다. 한편 장지연 선생의 친일행적에 대해 연구한 논문과 글들이 꽤 많이 존재하고 있다.
위암 장지연은 변절자?
장지연 선생은 1915년경부터 기사를 통해 “동양 평화를 지키려면 아시아의 맹주인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주의를 실현해 독일 등 백인종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장지연 선생이 친일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그의 친일 활동 시작점을 이 시기로 보고 있다.
덧붙여 장지연 선생이 1915년 1월 1일자 “조선풍속의 변천”이란 글에서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물산공진회’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혁구쇄신(革舊刷新)하여 쓸모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하여 진열한 것”이라 칭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울러 기사의 초반에도 언급한 1915년 7월 13일자 “만필소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동양 대국은 오직 일본과 지나(중국) 두 나라일 뿐이고, 서로 손을 잡고 친선한 다음에 외부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설명한다. 또한 2005년 3월 5일자《경향신문》은 장지연 선생이 《경남일보》 주필 시절 장기간에 걸쳐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KBS <시사투나잇>은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국사 교과서나 초등학생들이 읽는 위인전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저술과 이외 친일행적으로 의심되는 사료들
1917년 6월 8일자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
1915년 7월 3일자 “구주 전란의 기인”
부산대 강명관 교수 -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
연세대 김도형 교수 - 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
역사학자 이이화씨 -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박노자 부교수 - <당신들의 대한민국>
친일은 일부의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다?
장지연 선생의 오랜 친일 논란에 대해 찬반은 팽팽히 맞섰다. 국가보훈처는 2004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장지연 선생을 선정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정부 당시, 잇따른 의혹 제기에도 결국 장지연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했었다. 2003년 장지연 선생의 친일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지역신문 기자는 “기명이 아닌데다 장지연이 썼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며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장지연 친일 논란’의 쟁점 중 하나인 ‘천장절 축시’는 장지연 선생이 주필로 재직하던 《경남일보》가 1910년과 1911년 두 차례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한 한시다. 내용은 친일이 명백하나, 현재까지 이를 주필인 위암이 게재했다는 증거나 자료는 발견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지연 선생은 자작 한시에 ‘숭양산인(嵩陽山人)’이란 필명을 달아왔는데, 문제의 한시는 무기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축시 게재가 이뤄지기 한 달 전인 10월 11일에 장지연 선생은 기사 초반에 언급한 매천 황현의 「유시(遺詩)」를 자신의 해설과 함께 게재했다. 매천은 8월 30일 일제의 합병을 비난하며 자결한 인물이다. 장지연 선생의 유시 게재로 《경남일보》는 10일간 정간을 당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천장절 축시를 장지연의 친일 행적을 온전하게 뒷받침하는 근거로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장지연 선생의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매일신보》에서의 활동도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장지연 선생이 총독부 기관지에 영입돼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검증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장지연 선생은《매일신보》에 기고하는 조건으로 몇 가지 요구를 내걸었다고 한다.
“첫째, 나를 객례(客禮·손님)로 대접하되, 사원 칭호는 안 된다. 둘째, 기고하는 글은 조선의 일사유사(逸士遺事), 풍속(風俗), 종교(宗敎) 등이고 이것도 또한 여관에서 써서 보내고 신문사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셋째, 사장(위의 항을 지키겠다고 약속한)이 사임할 때, 나도 또한 동시에 그만 쓰겠다.”
위의 조건대로 1918년 사장 아베 미쓰이에가 사직하자 장지연 선생은 기고를 중단했다. 장지연 선생의 서훈 취소 당시 이에 항의한 이종석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당시 한국인이 발행하는 모든 신문이 강제 폐간된 상황에서 유일한 한글 신문인 《매일신보》에 기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며 “위암 선생의 기고 목적은 사라져가는 민족문화를 보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일본 영사의 현지 보고서를 공개하며 장지연 선생의 말년에 대해 “2009년 4월경 장지연 선생이 말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굽히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문건이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령의 장지연 선생이 의병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선 다른 사료도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기돼 진위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친일 청산만큼 중요한 것은 망각에 대한 경계심
장지연 선생의 친일 여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가 부족하기에 장지연 선생을 민족의 변절자라고 낙인찍을 수도, 말년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청송 같은 독립유공자라고 추앙하기도 애매하다. 만약 추후에 확실한 증거가 나와 장지연 선생의 친일 행적이 모두 명백한 사실이라고 밝혀지더라도, 후손들에게 장지연 선생을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삼을 자격이 있는가? 조국을 위해 저항했던 ‘시일야방성대곡’의 저항 정신 또한 장지연 선생의 삶이다. 애초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처럼 비난과 질타를 보내기엔 씁쓸한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자가 장지연 선생의 친일논란을 재차 조명하는 이유는 또다시 이 문제를 심판대에 세우고자함이 아니다. 친일파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독립 언론 뉴스타파의 <친일과 망각>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뉴스타파 측은 친일파 후손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저희는 선생님께서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해서 비난을 하거나 심판을 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과거 청산이 없이는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없고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도 없기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뿐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대한 치유 없이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스타파는 ‘친일청산’의 단두대 위에 세우기 위해 친일파의 후손들을 취재한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그 후손들과 국민들에게 뼈아픈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회심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방성대곡’을 교실에 앉아 배우던 기자가 어느새 성인이 된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현재 많은 전문가들이 장지연 선생의 친일 논란을 포함한 모든 반민족 행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규명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일제에 부역했던 세력들을 청산하고 역사의 어긋난 단추를 바로 꿰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우리 후손들의 바른 앎과 성찰일 것이다. 우리는 위암 장지연 선생에게 드리운 명암을 바로 보고 이를 경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안중근청년기자단 한희조 기자>
작성일 : 2018. 11. 12. 16:58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이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사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시일야방성대곡 中)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의 두 얼굴?
1905년 대한제국,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일제에 강탈당한 시기에 한 언론인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민족적 분노를 표현하는 명사설을 《황성신문》에 실었다. 이 언론인은 바로 위암 장지연 선생(1864~1921)이다. 장지연 선생은 이 외에도 흥사단 평의원을 맡거나 『경남일보』에 한일강제병합을 비난하며 자결한 매천 황현의 「유시(遺詩)」를 게재하기도 하며 일제탄압에 대해 저항활동을 펼쳤다. 이렇듯 장지연 선생은 꽤 오랜 시간동안 항일언론인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장지연 선생이 말년에 “동양평화를 위해 일본을 도와야 한다”는 등의 글을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수차례에 걸쳐 기고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의혹과 논란이 있다.
장지연 선생의 친일은 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장지연 선생은 일본을 ‘동양의 패왕’(1916년 9월 16일자 “만록-지리관계”)이라 했으며, ‘아시아를 재패한 전술로 볼 때 아시아의 독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915년 4월 21일자 “만필소어-신구학”)라고 서술하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아울러 장지연 선생은 데라우치 총독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세계의 보물이라 칭찬하고 박물관 공개를 추진했을 때 이에 감격하는 내용이 담긴 글(1915년 3월 25일자 “패창만필”)과 일왕의 제삿날에 가계(계통)를 소개하는 글(1915년 4월 3일자 “만필소어 신무천황제”)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만약 진실이라면 가히 충격적인 행보이다. 하지만 장지연 선생의 친일행적 논란에 대해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기자는 이 기사를 쓰기에 앞서 주변 지인 50명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기자의 지인 50명 중 장지연 선생의 친일행적 의혹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단 6명에 불과했으며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 또한 3명에 그쳤다.
설문 조사에 응한 지인 중 대부분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선생의 친일 논란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시일야방성대곡’은 고교시절 받았던 국사 교육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다룬 주제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사료인데다, 수능 출제율 또한 높은 범위에 해당됐기 때문이다.
‘우국지사 언론인’ 위암 장지연, 친일 논란 점화
장지연 선생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1894년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기도 했다. 1899년에는 <시사총보(時事叢報)> 주필, 1901년에는 <황성신문>사 사장 겸 주필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썼고 이로 인해 3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1909년부터는 ‘전국 지방지의 효시’로 알려진 <경남일보> 주필을 맡았는데, 이 때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해 이후 <경남일보>는 폐간되기도 하였다.
장지연 선생의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정부는 지난 2011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장지연 선생을 포함한 독립유공자 19명에 대한 서훈 취소를 결정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장지연 선생의 친일행적이 분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바로 어제까지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던 장지연 선생은 졸지에 친일파로 전락했고 반발은 거셌다.
국내에는 사단법인 ‘위암 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가 결성돼 있고, 매년 ‘위암 장지연상’등을 시상하기도 했다.
이 상을 수상했던 인사들은 장지연 선생의 건국훈장 서훈 취소 당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쪽만을 부각시켜 사람에 대한 평가를 갑자기 뒤엎는 것은 성숙한 역사관이 아니다”며 “아주 잘못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또 다른 매체는 장지연 선생의 친일 의혹을 제기했던 ‘민족문제연구소’ 측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가가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은 선례”라고 옹호했고 동시에 장지연 선생의 친일 논란은 점점 심화됐다. 한편 장지연 선생의 친일행적에 대해 연구한 논문과 글들이 꽤 많이 존재하고 있다.
위암 장지연은 변절자?
장지연 선생은 1915년경부터 기사를 통해 “동양 평화를 지키려면 아시아의 맹주인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주의를 실현해 독일 등 백인종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장지연 선생이 친일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그의 친일 활동 시작점을 이 시기로 보고 있다.
덧붙여 장지연 선생이 1915년 1월 1일자 “조선풍속의 변천”이란 글에서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물산공진회’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혁구쇄신(革舊刷新)하여 쓸모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하여 진열한 것”이라 칭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울러 기사의 초반에도 언급한 1915년 7월 13일자 “만필소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동양 대국은 오직 일본과 지나(중국) 두 나라일 뿐이고, 서로 손을 잡고 친선한 다음에 외부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설명한다. 또한 2005년 3월 5일자《경향신문》은 장지연 선생이 《경남일보》 주필 시절 장기간에 걸쳐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KBS <시사투나잇>은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국사 교과서나 초등학생들이 읽는 위인전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저술과 이외 친일행적으로 의심되는 사료들
1917년 6월 8일자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
1915년 7월 3일자 “구주 전란의 기인”
부산대 강명관 교수 -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
연세대 김도형 교수 - 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
역사학자 이이화씨 -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박노자 부교수 - <당신들의 대한민국>
친일은 일부의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다?
장지연 선생의 오랜 친일 논란에 대해 찬반은 팽팽히 맞섰다. 국가보훈처는 2004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장지연 선생을 선정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정부 당시, 잇따른 의혹 제기에도 결국 장지연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했었다. 2003년 장지연 선생의 친일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지역신문 기자는 “기명이 아닌데다 장지연이 썼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며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장지연 친일 논란’의 쟁점 중 하나인 ‘천장절 축시’는 장지연 선생이 주필로 재직하던 《경남일보》가 1910년과 1911년 두 차례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한 한시다. 내용은 친일이 명백하나, 현재까지 이를 주필인 위암이 게재했다는 증거나 자료는 발견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지연 선생은 자작 한시에 ‘숭양산인(嵩陽山人)’이란 필명을 달아왔는데, 문제의 한시는 무기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축시 게재가 이뤄지기 한 달 전인 10월 11일에 장지연 선생은 기사 초반에 언급한 매천 황현의 「유시(遺詩)」를 자신의 해설과 함께 게재했다. 매천은 8월 30일 일제의 합병을 비난하며 자결한 인물이다. 장지연 선생의 유시 게재로 《경남일보》는 10일간 정간을 당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천장절 축시를 장지연의 친일 행적을 온전하게 뒷받침하는 근거로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장지연 선생의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매일신보》에서의 활동도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장지연 선생이 총독부 기관지에 영입돼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검증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장지연 선생은《매일신보》에 기고하는 조건으로 몇 가지 요구를 내걸었다고 한다.
“첫째, 나를 객례(客禮·손님)로 대접하되, 사원 칭호는 안 된다. 둘째, 기고하는 글은 조선의 일사유사(逸士遺事), 풍속(風俗), 종교(宗敎) 등이고 이것도 또한 여관에서 써서 보내고 신문사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셋째, 사장(위의 항을 지키겠다고 약속한)이 사임할 때, 나도 또한 동시에 그만 쓰겠다.”
위의 조건대로 1918년 사장 아베 미쓰이에가 사직하자 장지연 선생은 기고를 중단했다. 장지연 선생의 서훈 취소 당시 이에 항의한 이종석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당시 한국인이 발행하는 모든 신문이 강제 폐간된 상황에서 유일한 한글 신문인 《매일신보》에 기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며 “위암 선생의 기고 목적은 사라져가는 민족문화를 보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일본 영사의 현지 보고서를 공개하며 장지연 선생의 말년에 대해 “2009년 4월경 장지연 선생이 말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굽히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문건이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령의 장지연 선생이 의병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선 다른 사료도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기돼 진위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친일 청산만큼 중요한 것은 망각에 대한 경계심
장지연 선생의 친일 여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가 부족하기에 장지연 선생을 민족의 변절자라고 낙인찍을 수도, 말년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청송 같은 독립유공자라고 추앙하기도 애매하다. 만약 추후에 확실한 증거가 나와 장지연 선생의 친일 행적이 모두 명백한 사실이라고 밝혀지더라도, 후손들에게 장지연 선생을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삼을 자격이 있는가? 조국을 위해 저항했던 ‘시일야방성대곡’의 저항 정신 또한 장지연 선생의 삶이다. 애초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처럼 비난과 질타를 보내기엔 씁쓸한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자가 장지연 선생의 친일논란을 재차 조명하는 이유는 또다시 이 문제를 심판대에 세우고자함이 아니다. 친일파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독립 언론 뉴스타파의 <친일과 망각>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뉴스타파 측은 친일파 후손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저희는 선생님께서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해서 비난을 하거나 심판을 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과거 청산이 없이는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없고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도 없기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뿐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대한 치유 없이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스타파는 ‘친일청산’의 단두대 위에 세우기 위해 친일파의 후손들을 취재한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그 후손들과 국민들에게 뼈아픈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회심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방성대곡’을 교실에 앉아 배우던 기자가 어느새 성인이 된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현재 많은 전문가들이 장지연 선생의 친일 논란을 포함한 모든 반민족 행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규명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일제에 부역했던 세력들을 청산하고 역사의 어긋난 단추를 바로 꿰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우리 후손들의 바른 앎과 성찰일 것이다. 우리는 위암 장지연 선생에게 드리운 명암을 바로 보고 이를 경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안중근청년기자단 한희조 기자>
작성일 : 2018. 11. 12. 1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