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청년기자단] 펜을 쥔 독립운동가는 어떻게 투쟁했는가 ①항일언론인

대한국인
2018-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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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기사 밑 댓글에는 ‘기레기’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이 용어는 요즘 독자들이 언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론의 탄압이 심했던 일제강점기임에도 제대로 된 언론의 역할과 기능을 보여준 사건이 있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펜은 칼보다 날카롭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글의 힘을 믿고 펜을 든 이들도 있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한글로 된 기사를 쓰며 조선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달하던 기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선수를 제치고 조선의 선수가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것을 보도하면서 조선의 선수가 달고 있던 일장기를 신문사에서 지워버린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에서 작은 체구의 동양 청년이 제일 먼저 결승점에 들어왔다. 동양인 최초의 마라톤 우승이었다. 경기장을 채운 관중들이 뜨거운 함성을 보냈지만, 그는 시상대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 선수의 이름은 손기정, 조선의 선수였으나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선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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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8월 13일 자 조선중앙일보의 신문(좌)

▲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의 신문(우)

  손기정의 우승이 국내에 전해지자 전 국민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각 신문은 호외를 발행하면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의 선수를 제치고 조선의 청년이 승리를 거머쥔 것에 모든 조선 사람이 열광했다. 1936년 8월 13일 자 조선중앙일보의 4면, 그리고 8월 25일 자 동아일보 2면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이 실렸다. 손기정 선수의 새하얀 유니폼과 함께 매끈하게 지워진 가슴팍이 돋보였다. 가슴의 일장기를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이다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처음에는 운 좋게 넘어갔다. 기사가 나가기 전 일본 검열관이 "사진에서 일장기가 왜 안 보이냐"고 물었으나 "인쇄기가 낡아서 그렇다"고 변명을 했고 자연스럽게 검열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기사에서는 꼬리가 잡혔고, 조선총독부의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 결과 조선중앙일보에서는 유해붕 기자가, 동아일보에서는 이길용 기자가 사진부원과 협의해 일장기 마크를 삭제한 것이 밝혀졌고 곧바로 모두 체포되었다. 독립운동이라 하면 치를 떨던 일본의 총독부에서 그들을 곱게 볼 리 없었다. 이들은 40여 일에 달하는 모진 고문을 겪고, 다시는 언론계에서 활동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일장기 말소 사건에 관해 유해붕이 작성한 1947년 1월 1일 후속 기사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중앙일보」사내의 사상의 조류는 당시 으레 어떠한 때든지 일장기 같은 것은 일차도 게재한 경험이 없다.” 또한 이길용 기자가 1948년에 쓴 회고록에서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은 ‘자신이 주도했으나 실제로는 동아일보사의 전통과 방침에 따라 처음부터 작정하고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기자들과 언론사들은 애초에 일장기를 기사에 실을 생각이 없었다. 한글로 된 우리민족의 신문에서 일장기를 싣는 것은 독자들에 대한 배신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의 힘은 강력하다. 기사에 실리는 문장 한 줄, 사진 한 장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한글신문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자 투쟁의 상징이었고,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그런데도 조선의 기자들은 펜을 들어 일장기를 지웠다.  칼이 아닌 펜으로 싸우는 조선의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안위보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의 기자들은 자신이 쓰는 기사의 힘을 믿고 올바른 곳에 쓴 지식인이었다. 반면, 오늘날 선동이나 왜곡 등 언론의 힘을 옳지 않은 곳에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언론인들에게 묻고 싶다.

(c) 안중근청년기자단 4기 박가현, 김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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