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악명높던 '경성형무소'-'마포형무소'옥사자 발굴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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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경성형무소옥사 증조부님 독립유공자 불인정 사연 증조부 독립운동 증명하려 자료찾아 36년 동분서주, 남은 자료 폐기하거나 불태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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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시 중랑구 중화동에 살고 있습니다. 먼저 국가보훈처장관님께서는 혹시 경성형무소인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보셨는지요. 그 자리가 악명 높다던 경성형무소입니다. 저의 증조부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신 자리이기에 일 년에 몇 번씩 그곳을 찾습니다.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고 분통이 터집니다. 가슴이 답답한 심정입니다. 제 증조부이신 정용선 선생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시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된후 옥사하셨음에도 역사의식의 부재와 자료 관리의 허술함으로 인해 아직까지 증거자료 부족으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해 국립묘지에 가묘도 안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증조부님께서는 독립과 광복을 이루시겠다는 일념으로 가족을 뒤로 하시고 항일독립투쟁을 하시다 체포된후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1928년 5월 20일 옥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명예를 인정받지 못한 채 잊혀 진 애국 잃어버린 애국이 되고 있어 증손자인 제가 지난 36년 관련 자료를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저는 제정호적을 찾았으나 국가보훈처는 '증거자료 부족'이라는 이유로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 진정한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 받치신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애국정신을 받들고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그리고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수집에 나서야 할 것이다.
▲ 악명높던 마포 공덕리 경성형무소 터 표지석 사진제공/정병기 | |
증조부 명예를 찾아야 하는 것은 자손 된 도리이자 당연지사
진정한 독립의 성지이자 메카이며, 수많은 독립투사 죽음 앞에 굴하지 않았다.
현재 마포구 공덕동 서부지방법원이 있는 자리에는 당초 경성형무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한일병합 조약 체결전인 1908년에 '경성감옥'이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진후 수용공간이 적어지자 이곳에 지은 후 1923년부터는 '경성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던 것입니다. 경성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동안 대전형무소와 함께 무기수나 장기 수형자를 수용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숙부인 김형권이 옥사한 곳이기도 합니다. 저의 증조부님 또한 이곳에서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일제의 만행으로 시신조차 인수하지 못해 구천을 맴도시는 증조부님의 영혼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 것이 자손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증조부님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머슴살이나 처가살이를 전전해며 고생을 달고 살았답니다. 배움에서 멀어지고 살기에 고통스러웠으며 일제의 모진 감시와 탄압 그리고 박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답니다. 누가 그런 고통을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증조모님은 일제의 모진 고문과 압박 감시에 집안의 주선으로 성을 개명하여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하셨답니다.
지난 35년을 증조부님 독립운동 자료발굴에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연을 관심있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미발굴독립운동하신 가족들 눈물겹게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지원해 주시고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증손자라도 찾지 않는다면 끝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행정심판에 각종 사연이 언론에 공개되고 보도되었어도 진전이 없는 증조부님의 옥사기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입니다. 일본 놈들에게 공짜로 옥사를 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정말 죽도록 나라위해 독립운동하신 독립운동가는 자손이 없거나 무지해서 찾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제 죽어서 그분들을 다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동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사망기록 호적이 있어도 인정해 주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고 야속한 심정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공직자 여러분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이제 정부는 현무소 옥사자 발굴에 앞장서야 한다.
증조부님이 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에 살고 계시다가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어 서울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증조부님의 명예회복을 통하여 자손도리를 다해야 되겠다는 신념과 의지로 여러분께 글을 올려 드립니다. 이제 증손자인 제가 찾지 않는다면 영원히 찾을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냥 사장되고 말 것입니다.
▲정 용선선생의 증손자가 찾아낸 제정호적 정병기 제공 | | 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 오후 3시20분 사망)형무소에서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경성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사망한 기록이 제적등본에 자세하고도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국가보훈처에서는 또 다른 자료를 요구하는 것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경성형무소가 6.25사변에 불이 나서 소실된 것이 왜 가족들에 책임입니까? 그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힘없는 가족에게 자료를 요구하지 말고 국가보훈처에서 자료 발굴 노력을 경주하여 진정한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 제출된 자료에 대하여 덮어 놓고 방치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자료에 대하여 다시한번 검증을 하여 주실 것을 아울러 간곡히 당부를 드립니다.
민원을 제기한 가족에 입장에서 한번 생각보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은 긴 세월동안 많은 풍지풍파와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음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애국지사와 애국선열들이 흘린 피의 댓가와 노력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 발전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런 편지를 국가보훈처에 써야 하며 외쳐야 합니까? 국가보훈처에서는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번에 저의 증조부 고 정요선 할아버지의 자료를 재검토하여 보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국가보훈처에서 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구호만 요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호적 (제적등본) 내용 살펴 힘없고 빽 없고 줄 없는 가족 발굴해야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없어진 자료를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독립운동 보상 받으려고 했겠습니까?
국가보훈처가 자신들이 찾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짐을 떠넘기는 일을 언제까지 하려는지요. 또 가족들이 제출하는 관련 서류조차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묵살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제 부모 제조상 같으면 이렇게 하려나 싶은 심정입니다.
저 자신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랍니다. 저희 부친은 문맹인으로 살고 계시며 평생 어렵게 할아버지도 일찍 일제 핍박에 돌아 가시고 고아 아닌 고아로 어렵게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신 분이십니다.
이미 저의 증조부자료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에 제출한지 오래이며 민족의 비극인 6.25 사변으로 인하여 경성형무소가 소실되고 지방에 본적지 면사무소가 소실되어 더 이상의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의 사연을 다시한번 살펴보시고 자손 된 도리를 다하고 일제에 의해 옥사로 단명하신 증조부님의 영혼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 입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항거하며 항일운동 중 체포되어 41세의 생을 경성형무소 감방에서 마감하신 증조부님의 명예를 반드시 찾아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치욕적인 식민지 역사라 할지라도 후세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보여줘 제대로된 역사의식과 나라사라정신을 배우고 교훈삼게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숨기고 없애는 것보다 사실 그대로 남겨 역사관으로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지난날의 정권들이 자신들의 치부와 허물을 덮고 친일청산을 가리고 덮기 위하여 무리하게 반영구적으로 본하고 남겨야 할 자료들을 없애고 파기한것은 반성해야 할것이라고 보며 우리도 앞으로 제대로된 사실적인 역사와 자료를 남겨 후세들에게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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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독립운동 증명하려 자료찾아 36년 동분서주, 남은 자료 폐기하거나 불태워,
저는 서울시 중랑구 중화동에 살고 있습니다. 먼저 국가보훈처장관님께서는 혹시 경성형무소인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보셨는지요. 그 자리가 악명 높다던 경성형무소입니다. 저의 증조부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신 자리이기에 일 년에 몇 번씩 그곳을 찾습니다.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고 분통이 터집니다. 가슴이 답답한 심정입니다.
제 증조부이신 정용선 선생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시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된후 옥사하셨음에도 역사의식의 부재와 자료 관리의 허술함으로 인해 아직까지 증거자료 부족으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해 국립묘지에 가묘도 안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증조부님께서는 독립과 광복을 이루시겠다는 일념으로 가족을 뒤로 하시고 항일독립투쟁을 하시다 체포된후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1928년 5월 20일 옥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명예를 인정받지 못한 채 잊혀 진 애국 잃어버린 애국이 되고 있어 증손자인 제가 지난 36년 관련 자료를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저는 제정호적을 찾았으나 국가보훈처는 '증거자료 부족'이라는 이유로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 진정한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 받치신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애국정신을 받들고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그리고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수집에 나서야 할 것이다.
증조부 명예를 찾아야 하는 것은 자손 된 도리이자 당연지사
진정한 독립의 성지이자 메카이며, 수많은 독립투사 죽음 앞에 굴하지 않았다.
현재 마포구 공덕동 서부지방법원이 있는 자리에는 당초 경성형무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한일병합 조약 체결전인 1908년에 '경성감옥'이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진후 수용공간이 적어지자 이곳에 지은 후 1923년부터는 '경성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던 것입니다.
경성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동안 대전형무소와 함께 무기수나 장기 수형자를 수용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숙부인 김형권이 옥사한 곳이기도 합니다. 저의 증조부님 또한 이곳에서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일제의 만행으로 시신조차 인수하지 못해 구천을 맴도시는 증조부님의 영혼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 것이 자손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증조부님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머슴살이나 처가살이를 전전해며 고생을 달고 살았답니다. 배움에서 멀어지고 살기에 고통스러웠으며 일제의 모진 감시와 탄압 그리고 박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답니다. 누가 그런 고통을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증조모님은 일제의 모진 고문과 압박 감시에 집안의 주선으로 성을 개명하여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하셨답니다.
지난 35년을 증조부님 독립운동 자료발굴에 힘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연을 관심있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미발굴독립운동하신 가족들 눈물겹게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지원해 주시고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증손자라도 찾지 않는다면 끝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행정심판에 각종 사연이 언론에 공개되고 보도되었어도 진전이 없는 증조부님의 옥사기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입니다. 일본 놈들에게 공짜로 옥사를 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정말 죽도록 나라위해 독립운동하신 독립운동가는 자손이 없거나 무지해서 찾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제 죽어서 그분들을 다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동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사망기록 호적이 있어도 인정해 주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고 야속한 심정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공직자 여러분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이제 정부는 현무소 옥사자 발굴에 앞장서야 한다.
증조부님이 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에 살고 계시다가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어 서울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증조부님의 명예회복을 통하여 자손도리를 다해야 되겠다는 신념과 의지로 여러분께 글을 올려 드립니다. 이제 증손자인 제가 찾지 않는다면 영원히 찾을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냥 사장되고 말 것입니다.
분명히 경성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사망한 기록이 제적등본에 자세하고도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국가보훈처에서는 또 다른 자료를 요구하는 것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경성형무소가 6.25사변에 불이 나서 소실된 것이 왜 가족들에 책임입니까? 그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힘없는 가족에게 자료를 요구하지 말고 국가보훈처에서 자료 발굴 노력을 경주하여 진정한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 제출된 자료에 대하여 덮어 놓고 방치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자료에 대하여 다시한번 검증을 하여 주실 것을 아울러 간곡히 당부를 드립니다.
민원을 제기한 가족에 입장에서 한번 생각보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은 긴 세월동안 많은 풍지풍파와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음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애국지사와 애국선열들이 흘린 피의 댓가와 노력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 발전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런 편지를 국가보훈처에 써야 하며 외쳐야 합니까? 국가보훈처에서는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번에 저의 증조부 고 정요선 할아버지의 자료를 재검토하여 보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국가보훈처에서 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구호만 요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호적 (제적등본) 내용 살펴 힘없고 빽 없고 줄 없는 가족 발굴해야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없어진 자료를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독립운동 보상 받으려고 했겠습니까?
국가보훈처가 자신들이 찾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짐을 떠넘기는 일을 언제까지 하려는지요. 또 가족들이 제출하는 관련 서류조차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묵살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제 부모 제조상 같으면 이렇게 하려나 싶은 심정입니다.
저 자신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랍니다. 저희 부친은 문맹인으로 살고 계시며 평생 어렵게 할아버지도 일찍 일제 핍박에 돌아 가시고 고아 아닌 고아로 어렵게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신 분이십니다.
이미 저의 증조부자료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에 제출한지 오래이며 민족의 비극인 6.25 사변으로 인하여 경성형무소가 소실되고 지방에 본적지 면사무소가 소실되어 더 이상의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의 사연을 다시한번 살펴보시고 자손 된 도리를 다하고 일제에 의해 옥사로 단명하신 증조부님의 영혼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 입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항거하며 항일운동 중 체포되어 41세의 생을 경성형무소 감방에서 마감하신 증조부님의 명예를 반드시 찾아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치욕적인 식민지 역사라 할지라도 후세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보여줘 제대로된 역사의식과 나라사라정신을 배우고 교훈삼게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숨기고 없애는 것보다 사실 그대로 남겨 역사관으로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지난날의 정권들이 자신들의 치부와 허물을 덮고 친일청산을 가리고 덮기 위하여 무리하게 반영구적으로 본하고 남겨야 할 자료들을 없애고 파기한것은 반성해야 할것이라고 보며 우리도 앞으로 제대로된 사실적인 역사와 자료를 남겨 후세들에게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