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는 등 가톨릭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5·18의 진상규명을 위해 재야인사들과 <일요산악회>를 조직해 활동
- 복사기가 흔하지 않았던 때에 당시 근무하던 전매청 사무실에 있는 복사기를 활용해 5·18의 진상규명을 위해 유인물을 제작하고 전국에
배포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이것이 발각되어 1981년 여름경에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끝까지 부인하여 위기를 모면함.이후에도
5·18 수배자였던 최운용 선생을 자택에 숨겨주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재판의 공동변론에 나선 홍남순 변호사님과 김성용 신부님을 도와 수차례 부산 법정까지 동행
○ 1991년~1994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정평) 위원으로 활동
- 지속되었던 5·18진상규명 활동은 물론, 정평위 위원으로서 1991년 경찰의 폭력에 의해 대학생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보고 분신했던 전남대생 박승희 열사의 투병과 장례미사 그리고 영광 핵발전소 3·4호기 준공반대 및 5·6호기 착공반대 활동 등 수많은 정평위 활동에 참여하고
지원
○ 2002년~2003년 푸른나주협의회 의장
- 영산강살리기운동본부(본부장 서한태 박사)에 함께하여 환경운동에 적극 참여
○ 2003년 여름, 수해로 고립된 남평읍 평산리 주민들 20여명 구출
- 해병대에 복무했던 박종주 님은 나주에 수해가 났을 때 나주해병전우회 회장으로서 경찰과 소방대원들도 속수무책이었던 상황에서 한밤중에
긴급하게 전우회를 소집, 전우들과 함께 고무보트와 잠수복 등 수중장비를 이용해 주민들을 구출
○ 2003년 이후 사)광주청소년서포터즈 활동
-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던 가톨릭 후배들과 함께 ‘사)광주청소년서포터즈’를 창립했으며, 이후 태국 메솟지역의 미얀마 난민촌에 난민학교 2곳을
신축했고, 2005년에는 베트남에서 청소년봉사단장을 맡아 25명의 청소년을 인솔, 고엽제피해자 가정 주택신축. 또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수차례 방문해 대학생 및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사업을 추진하는데 헌신
○ 1964년 가톨릭교회에서 세례(세례명 : 크리스토폴) 받음
○ 1967년부터 37년 동안 전매청(현, KT&G)에서 공직 생활(영암, 나주 등 지점장 역임)
○ 1971년 정갑숙 님과 결혼, 슬하에 1남 2녀를 둠
○ 1970년대 하반기
○ 1980년 5·18민중항쟁
- 5·18민중항쟁 직후 가톨릭교회가 5·18의 진상규명과 구속 시민들과 사제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월요미사에 참여하면서 미사해설(사회)을
- 복사기가 흔하지 않았던 때에 당시 근무하던 전매청 사무실에 있는 복사기를 활용해 5·18의 진상규명을 위해 유인물을 제작하고 전국에